『노예의 길』 — 우리는 왜 자유를 잃어버리는가
올해 첫 책으로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을 다시 펼쳤다. 처음 읽은 것이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책장을 정리하다 발견한 책의 여백에 옅은 연필 자국이 남아 있었고, 거기 적힌 글씨가 지금의 내 글씨와 사뭇 달랐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아마 학생 때였을 것이다. 그 책이 한참 동안 책장에서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은, 다시 펼치는 순간 어떤 부끄러움 같은 감정으로 돌아왔다.
지난 몇 해 동안은 일이 바빴다. 작년에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다시 책을 손에 잡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읽고 싶은 책과 읽을 수 있는 시간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새해의 첫 책으로 굳이 두꺼운 사상서를 고른 데에는, 미뤄둔 약속을 더는 미루지 말자는 마음이 있었다. 작년 한 해 동안 경영서, 인문서, 소설을 두루 읽었지만, 정작 가장 깊이 파고들고 싶었던 종류의 책은 피하고 있었다. 올해는 거기로 가보자는 생각이었다.
한 달이 걸렸다. 짧은 책이지만, 한 페이지를 넘기고 다시 한 페이지를 되돌아오기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밑줄을 긋다가 지우고, 다시 긋고, 또 지웠다. 어떤 문장은 세 번을 읽어야 무게가 느껴졌다.
다 읽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책이 1944년에 쓰였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이에크는 2차 대전 승전을 눈앞에 둔 영국에서, 사람들이 나치 독일을 혐오하면서도 정작 자기들 사회는 비슷한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전쟁이 끝나면 정부가 경제를 계획하고, 자원을 합리적으로 배분하고,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와 주거와 의료를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하이에크는 그 목소리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가 의심한 것은 그 선의가 향하는 방향이었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가장 인상에 남았던 대목은, 하이에크가 사회주의자들의 동기를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는 그들이 나쁜 사람들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이상이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며, 종종 가장 헌신적이고 가장 도덕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이 대목이 이 책의 품격을 결정한다. 상대의 동기를 인정한 위에서 그 논리를 비판하는 것. 이것은 논쟁의 가장 높은 형태다. 상대를 악인으로 만들면 비판은 쉬워지지만, 설득력은 떨어진다. 하이에크는 그 쉬운 길을 가지 않는다.
그가 던진 질문은 동기의 진위를 묻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질문이었다.
“좋은 의도로 시작된 계획이, 왜 결국 가장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이어지는가.”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한 번 읽어서 끝나는 종류가 아니다. 한 사회의 모든 자원을 합리적으로 배분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거대한 권력을 필요로 한다. 누가 얼마나 생산하고, 누가 얼마나 소비할지를 결정하려면, 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어딘가에 집중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권력은 결국 누군가의 손에 쥐어진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다른 사람들의 삶을 결정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선택은 점점 좁아진다. 그것이 책 제목 그대로, 노예의 길이다.
하이에크가 가장 깊이 파고드는 것은 이 점이다. 계획이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계획자의 사악함 때문이 아니다. 계획 자체의 논리가 그렇게 작동한다는 것이다. 자원을 합리적으로 배분하려면 누구의 욕구가 더 가치 있는지를 누군가가 판단해야 한다. 그 판단은 시장에서처럼 무수한 사람들의 자발적 거래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 사람 혹은 한 집단의 결정으로 이루어진다. 그 결정에 권위가 부여되는 순간,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자유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작년에 읽은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 떠올랐다. 스미스가 발견한 것도 비슷했다. 시장의 가격 메커니즘은 누구도 설계하지 않은 질서다. 무수한 사람들의 자발적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다. 하이에크는 이 통찰을 더 밀고 나간다. 시장이 단순히 효율적이기 때문에 옹호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누구도 다른 누군가의 삶을 통째로 결정하지 못하게 하는 거의 유일한 사회적 장치이기 때문이라고. 가격이라는 신호는 누구의 명령도 아니다. 그 신호가 사라진 자리에는 반드시 누군가의 명령이 들어선다. 시장을 폐지하는 것은 명령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의 주체를 바꾸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읽는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은 것은, 이런 일이 전쟁이나 혁명 같은 극적인 순간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좋은 일을 하자는 명분 아래, 누군가의 자유는 조용히 작아진다. 그 변화는 너무 점진적이어서 한 사람의 일생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어제보다 오늘 자유가 줄었다는 것을 느끼기 어렵다. 물이 천천히 데워지면 개구리가 뛰쳐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그래서 하이에크는 책의 마지막에서, 한 세대가 누렸던 자유는 다음 세대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면 사라진다고 썼다.
회사에서 의사결정을 하다 보면 종종 비슷한 장면을 본다. 모두에게 좋은 일을 하자는 합의가 이루어지고, 그 합의를 실행하기 위한 규정이 만들어지고, 그 규정을 관리하는 부서가 생긴다. 처음의 선의는 시간이 지날수록 규정 그 자체가 되고, 사람들은 더 이상 그 규정이 왜 만들어졌는지 묻지 않는다. 묻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 된다. 규정은 자기 증식한다. 하나의 규정이 새로운 문제를 만들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다른 규정이 만들어진다. 작은 조직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데, 한 나라에서 같은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될까. 하이에크가 보여준 것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일관된 답이었다.
이번에 다시 읽으며 새로 들어온 것은, 이 책이 단순한 사회주의 비판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처음 읽을 때는 책의 표면, 즉 계획경제에 대한 경고에만 시선이 갔다. 사회주의는 나쁘다, 시장경제는 좋다, 이런 단순한 도식으로 읽었던 것 같다. 그러나 다시 펼쳐보니 책의 진짜 무게는 그 너머에 있었다. 하이에크가 말하려 한 것은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약속인가라는 것이었다. 자유는 한 번 얻으면 영영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매 세대가 다시 그 의미를 묻고, 그 무게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겨우 유지되는 것이다.
자유는 거창하지 않다. 자기 일을 자기가 결정할 수 있는 자유, 그리고 그 결정의 결과를 자기가 책임지는 자유다. 누군가는 그것이 너무 차갑다고 말할 수 있다. 사회가 개인의 실패를 감싸주지 않는 것이 자유라면, 그것은 냉혹한 자유가 아닌가. 이 비판을 하이에크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나서 든 생각은, 그 차가움이야말로 한 사회가 구성원을 어른으로 대접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라는 것이었다. 어른으로 대접한다는 것은 스스로 결정하게 하고, 그 결정의 무게를 지게 하는 것이다. 그 무게를 대신 져주겠다는 약속은 따뜻해 보이지만, 그 약속의 끝에는 언제나 누군가의 자유가 줄어든다.
이 책을 다시 펼치면서 새해의 한 가지 다짐을 했다. 사두고 펴보지 못한 책들을 차례로 다시 꺼내겠다는 다짐이다. 그 책들 가운데에는 한 번 읽고 그 무게를 다 감당하지 못해 덮어둔 것들이 적지 않다. 어떤 책은 어른이 되어야 비로소 무게가 느껴진다. 어떤 책은 두 번째 읽을 때에야 첫 줄의 의미가 보인다. 그런 책들과 다시 만나는 시간을 올해는 좀 더 충분히 가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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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원저 The Road to Serfdom (19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