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다시 읽기 — 4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
4년 전에 읽은 『노르웨이의 숲』을 다시 읽었다. 한국어 제목은 『상실의 시대』. 같은 소설인데 제목이 다른 것이 이 소설의 양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 노르웨이의 숲은 비틀즈의 곡 제목이고, 나오코의 기억과 연결된다. 상실의 시대는 소설의 주제를 직접적으로 가리킨다. 원제의 서정과 번역 제목의 직접성.
4년 전에 쓴 글을 다시 읽었다. 하루키의 건조한 문체, 나오코와 미도리의 대비, 상실을 안고 살아가는 것. 그때 쓴 것이 틀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읽으니 다른 것이 보인다.
이번에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와타나베의 독서 장면들이다. 4년 전에는 인물들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이번에는 와타나베가 책을 읽는 장면들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그는 끊임없이 책을 읽는다. 기숙사에서, 공원에서, 카페에서. 피츠제럴드, 트루먼 커포티, 레이먼드 챈들러. 그의 독서 목록이 그의 성격을 말해준다. 건조하고, 세련되고, 감상에 빠지지 않는 작가들. 하루키 자신의 취향이 와타나베에게 투영된 것이다.
책을 읽는 인물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돈키호테는 기사 소설을 읽고 미쳤다. 파우스트는 모든 학문을 읽고 절망했다. 와타나베는 책을 읽으면서 삶과 죽음 사이를 건넌다. 독서가 인물을 정의하는 소설들. 이 블로그를 쓰는 것도 어쩌면 비슷한 일이다. 읽은 책이 나를 만든다. 이 블로그의 6년치 글이 곧 나의 초상이다.
나오코의 비극이 이번에는 더 아프게 읽혔다. 4년 전에는 나오코를 와타나베의 시선으로만 보았다. 와타나베가 구하지 못한 사람. 이번에는 나오코 자체에 시선이 갔다. 그녀가 겪는 고통은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다. 내부에서 온 것이다. 자기 안의 어둠과 싸우는 것. 이 싸움에서 다른 사람은 도울 수 없다. 옆에 있을 수는 있지만, 대신 싸울 수는 없다. 이 무력감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보다 더 아프다.
4년 동안 내가 변했다. 더 많은 책을 읽었고, 더 많은 경험을 했다. 그 변화가 같은 소설을 다르게 읽게 만든다. 처음 읽을 때는 와타나베에 감정이입했다. 이번에는 한 걸음 물러나서 본다. 와타나베도 완벽한 인물이 아니다. 그의 거리감이 나오코에게 상처를 주었을 수 있다. 미도리에게 성실하지 못한 것도 문제다. 처음에는 이런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20대의 방황에 공감하기 바빴으니까. 이제는 그 방황을 밖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재독의 가치는 여기에 있다. 같은 텍스트가 다른 경험을 준다. 텍스트가 바뀐 것이 아니라 독자가 바뀐 것이다. 이것은 하이에크를 다시 읽었을 때도 느낀 것이다. 책은 거울이다. 거울에 비치는 것은 거울이 아니라 보는 사람이다.
재독하면서 하루키의 죽음 묘사에 대해 생각했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죽음은 갑자기 온다. 예고 없이, 설명 없이. 기즈키는 자살했다. 왜? 설명 없다. 나오코도 죽었다. 과정은 있지만, 궁극적인 이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 설명의 부재가 오히려 현실적이다. 현실에서도 죽음은 설명되지 않는다. 남은 사람은 이유를 찾으려 하지만, 이유는 없거나, 있어도 납득되지 않는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바로 다음에 읽을 예정이다. 안나의 죽음은 하루키의 나오코의 죽음과 다른 종류의 죽음이다. 안나의 죽음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설명 가능하다. 나오코의 죽음은 내면의 어둠으로만 설명된다. 두 죽음 모두 비극이지만, 비극의 원천이 다르다. 사회가 죽이는 것과 내면이 죽이는 것.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다시 떠오른다. 와타나베가 미도리에게 전화하는 장면. 지금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 그리고 자기도 모르겠다는 답. 4년 전에 이 장면을 읽었을 때는 와타나베의 방황에 공감했다. 이번에는 미도리의 입장에서 생각했다. 전화를 기다리는 사람. 상대가 올지 안 올지 모르면서 기다리는 사람. 미도리의 인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조용한 용기다.
가을이 깊다. 비틀즈의 노르웨이안 우드를 다시 들었다. 4년 전에도 이 곡을 들으면서 이 소설을 읽었다. 멜로디는 같은데 느낌이 다르다. 그때는 서정적이었다면, 지금은 쓸쓸하다. 4년이라는 시간이 멜로디의 뒤편에 쌓여 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원저 ノルウェイの森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