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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정치 · 4월. 19, 2026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사유하지 않는 일이 어떻게 거대한 악이 되는가

지난달의 회고를 마치고 나서, 다음 책을 잡기까지 며칠이 비어 있었다. 81권을 정리하고 나니 어느 부분이 비었는지가 도리어 또렷이 보였다. 자유에 관한 책은 그 7년 동안 꽤 많이 읽었다. 하이에크, 포퍼, 프리드먼. 자유의 토대를 말한 사람들. 그러나 그 자유가 어떻게 무너지는가, 무너지는 순간에 사람은 어떤 얼굴을 하는가에 관한 책은 별로 없었다. 이상한 결락이었다.

서울로 돌아온 어느 일요일이었다. 4월의 낮이 길어진 게 새삼 느껴지는 오후였다. 책장을 정리하다가 안쪽 두 번째 줄에서 표지가 누렇게 변한 책 한 권을 꺼냈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판이었다.

표지를 한참 들여다봤다. 분명히 읽은 적이 있다. 어느 해 여름인가, 한 학기 동안 어딘가에서 끼고 다녔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도서관 열람실에서 한참을 앉아 있다가 끝까지 가지 못하고 반납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책 안의 어떤 문장이 떠오르냐고 물으면 답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부제만 또렷이 남아 있었다. 악의 평범성. 그 말의 무게는 모른 채, 단어만 외우고 지나간 것이다.

다시 펼치고 첫 몇 페이지를 넘긴 순간, 전혀 다른 책 같았다. 그날 밤 자정을 넘기고도 책을 놓지 못했다.

책이 쓰인 사정을 짧게 적어둔다. 1961년 예루살렘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이 열렸다. 아이히만은 나치 친위대 중령으로, 유럽 유대인의 강제이송을 책임진 행정관이었다. 종전 후 아르헨티나로 잠적했다가 모사드에게 잡혀 이스라엘로 이송됐다. 한나 아렌트는 미국 잡지 『뉴요커』의 의뢰를 받아 그 재판을 직접 참관했고, 연재 기사를 모은 책이 1963년에 나왔다.

문제는 책이 출간되자마자 아렌트가 거의 사방에서 비난받았다는 점이다. 그가 아이히만을 두둔했다는 오해가 가장 흔했다. 책을 직접 읽으면 그 오해가 왜 일어났는지 알게 된다. 아렌트의 결론은 결코 두둔이 아니다. 다만 그 결론이 너무 차갑고 너무 비대중적이어서,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뿐이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든 인상은 단순했다. 아이히만은 평범했다. 광인이 아니었다. 가학적 새디스트도 아니었다.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잘 알았고, 그것을 평범한 직장인의 언어로 말했다. 승진을 원했다. 상관의 인정을 원했다. 일을 잘 해내고 싶었다. 명령을 효율적으로 집행하는 데서 보람을 느꼈다. 그가 집행한 명령의 결과가 인간 수백만 명의 죽음이라는 사실은, 그의 마음 안에서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그때의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솔직히 잘 떠오르지 않는다. 사상사 수업에서 이름이 한 번 등장한 책이라, 결론만 외우면 된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때의 나에게 아이히만은 멀리 있는 사람이었다. 1940년대 어느 독일 관료. 역사 교과서 속의 인물. 지금의 나에게 그는 더는 멀리 있지 않다.

아렌트가 책 전체에서 반복하는 한 단어가 있다. 사유의 결여. 그것은 어리석음과는 다르다. 아이히만은 멍청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자기 머리로 생각하지 않았다. 시스템이 부여한 언어로 자기 행위를 설명했다. 그 언어 바깥에서는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재판에서 그가 사용한 어휘는 놀라울 정도로 빈약했다. 상투구로 가득했다. 자신이 한 일을 다른 식으로 표현해보라는 요청에 그는 끝내 답하지 못했다.

여기서 아렌트의 핵심 명제가 나온다. 거대한 악은 거대한 악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 충분히 정교한 시스템과, 그 안에서 자기 위치만 성실히 수행하는 보통 사람들이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 광인이 아니라 모범 직원이 그 일을 한다는 것.

이 명제가 두려운 이유는, 그것이 도덕적 면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 오해되듯 “그도 시스템의 피해자였다”는 식의 변호가 결코 아니다. 정반대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에게 더 가혹한 책임을 묻는다. 광인은 책임 능력이 없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은 사유할 능력이 있고, 그 능력을 발휘하지 않은 책임은 그 자신에게 있다. 그가 사유하기를 그만둔 순간, 그는 인간이기를 그만둔 것이다. 그래서 책의 결론에서 아렌트는 그를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이 결론을 써내려가는 아렌트의 문장은 차갑다. 분노가 없다. 한탄이 없다. 다만 사실의 인식이 있을 뿐이다. 이 차가움이 출간 당시 가장 많이 비난받은 부분이었다. 사람들은 더 뜨거운 단죄를 원했다. 그러나 아렌트는 단죄가 너무 뜨거우면 그 안에 담긴 진실이 흐려진다고 보았다. 진실은 차갑게 적어야 더 무겁게 남는다. 이 점에 동의하기까지 십수 년이 걸렸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오래 멈춘 대목은, 그러나 아이히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이히만 주변의 평범한 관료들,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던 언어였다. 시스템이 부여한 어휘로만 자기 행위를 설명하던 사람들. 그 어휘 바깥에서는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던 사람들. 거대한 악은 그런 언어의 빈곤 위에서 가능했다.

이 책의 진짜 무거움은 한 개인의 양심에 머물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것은 한 사회가 어떻게 자유에서 멀어지는가에 관한 진단이기도 하다. 자유는 광인의 폭력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그런 폭력은 본능적으로 막힌다. 자유는 평범한 사람들이 시스템의 언어로만 말하기 시작할 때, 그 언어 바깥에서는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게 될 때, 그 빈곤이 일상의 표준이 될 때, 그렇게 천천히 잠식된다. 신호는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어휘에 먼저 나타난다.

이 대목에서 책을 잠시 덮었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그 진단의 어디쯤에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적자면, 나는 우리 사회가 자유에 가까워지는 방향이 아니라 멀어지는 방향에 서 있다고 본다. 어느 한 사건 때문이 아니다. 사람들이 점점 같은 어휘로만 말하고, 그 어휘에 동의하지 않는 의견을 묘하게 불편해하고, 자기 머리로 한 번 더 생각하기를 미루는 풍경이 일상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의 진단이 멀리 있지 않다는 감각이 그날 밤 책장에 머물렀다.

같은 책을 십수 년 만에 다시 펼치고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책은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읽는 사람이고, 그 사람이 살아온 사회다. 이십대의 나는 아렌트의 통찰을 자기 사회에 비추어 읽지 못했다. 비출 사회가 아직 그렇게까지 와 있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고, 비출 눈이 아직 자라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이제는 둘 다 분명해졌다.

이 책을 자유에 관한 책들 옆에 두고 나면, 7년간 읽은 사상서들의 한 결락이 채워지는 느낌이 든다. 하이에크는 권력의 집중이 자유를 어떻게 잠식하는가를 분석했다. 그러나 그 잠식이 일어나는 동안 평범한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에 관한 인간학적 보충은 그의 책에 충분히 들어 있지 않았다. 아렌트가 그 자리를 채운다. 권력의 집중은 시스템이 만들고, 시스템은 사유를 멈춘 사람들이 작동시킨다. 한 명은 구조를 보고 한 명은 사람을 본다. 두 책이 책장에서 가까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만 책이 다 좋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중반부에서 재판 진행을 사실대로 따라가는 부분이 다소 늘어진다. 등장인물의 이름이 한 번에 정리되지 않아 두어 번 앞으로 돌아가 확인해야 했다. 잡지 연재였다는 사정을 감안해야 하는 대목이다. 1960년대 이스라엘과 미국의 정치적 맥락이 깔린 단락에서는 옮긴이의 주석에 여러 번 의존했다. 솔직히 두어 차례 책을 덮고 며칠씩 미뤄두었다.

그래도 끝까지 갔다. 마지막 30페이지의 결론을 위해서라도 갈 가치가 있는 책이었다.

책을 덮은 다음 날에도 한 문장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유의 능력만이 사람의 능력으로 남는다.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작은 실천 하나가 그 능력을 지켜낸다는 사실. 자기 입에서 나오는 어휘를 한 번 더 살피는 일. 다수의 언어 안에서 자기 단어를 잃지 않는 일. 동의하지 않을 때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일. 이런 사소함의 누적이, 한 사회가 자유에서 얼마나 멀어지는가를 결정한다고 아렌트는 말하고 있었다.

책을 책장에 꽂으면서 옆자리를 잠시 비워두었다. 다음에는 무엇이 와야 할까. 모르겠다. 한동안은 그 자리를 비워두기로 했다.

한나 아렌트
원저 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19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