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마코스 윤리학』 —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처음 읽는다. 플라톤의 『국가』와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거쳐, 이제 그의 제자에게 도달했다. 스승이 이상 국가를 꿈꾸었다면, 제자는 좋은 삶을 물었다. 더 구체적이고, 더 현실적이고, 더 실용적인 질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핵심 개념은 에우다이모니아다. 행복이라고 번역되지만, 행복과는 좀 다르다. 좋은 삶, 번영하는 삶, 잘 살아감에 가깝다. 행복이 순간적 감정이라면, 에우다이모니아는 삶 전체의 질이다. 한 순간 기분이 좋은 것이 아니라, 삶 전체가 잘 작동하는 것. 죽은 뒤에야 비로소 그 사람이 에우다이모니아를 누렸는지 판단할 수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이 관점이 현대의 행복 담론과 얼마나 다른지를 생각해보았다. 현대인의 행복은 순간적이다. 맛있는 음식, 즐거운 여행, 좋은 콘서트. 이런 것들이 행복이라고 불린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다이모니아는 이런 것이 아니다. 좋은 삶은 덕을 실천하는 삶이다. 용기, 절제, 정의, 지혜. 이 덕목들을 일관되게 실천할 때 좋은 삶이 이루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개념이 인상적이었다. 모든 덕은 두 극단 사이의 중간이다. 용기는 비겁함과 무모함의 중간이다. 관대함은 인색함과 낭비의 중간이다. 이 중간을 찾는 것이 지혜다. 그리고 이 중간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행동이 한 상황에서는 용기이고 다른 상황에서는 무모함일 수 있다. 이 유연성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칸트의 절대적 도덕법칙과 구별짓는다.
니체가 기존 도덕을 공격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존 도덕의 토대를 놓은 사람이다. 니체를 읽고 나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으니, 니체가 공격한 것이 무엇인지가 더 선명해진다. 니체는 덕의 보편성을 의심했다. 겸손이 정말 덕인가, 약자의 전략이 아닌가. 아리스토텔레스라면 겸손은 자만과 비하의 중간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가 가능했다면 흥미로웠을 것이다.
프랭클의 의미 이론과도 연결된다.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인간의 근본 동기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삶을 사는 것이 인간의 목적이라고 했다. 두 사람의 답은 다르지만 질문은 같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프랭클은 의미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통해 답한다.
이 책은 쉽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은 체계적이지만 반복적이다. 같은 주장을 다른 각도에서 여러 번 반복한다. 인내가 필요했다. 그러나 인내의 대가는 있었다. 2500년 전의 질문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영원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정론도 이 책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는 우정을 세 종류로 나눈다. 쾌락의 우정, 유용성의 우정, 덕의 우정. 쾌락의 우정은 함께 있으면 즐거운 사람과의 관계다. 유용성의 우정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과의 관계다. 덕의 우정은 서로의 덕을 존중하는 사람과의 관계다. 세 번째가 가장 드물고 가장 깊다.
이 분류가 현대에도 유효하다는 것이 놀랍다. 회사에서의 관계는 대부분 유용성의 우정이다.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과의 관계는 쾌락의 우정이다. 진짜 친구, 즉 서로의 가치관을 존중하고 서로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관계는 덕의 우정이다. 이런 관계가 몇이나 되는가. 아마 손에 꼽을 것이다.
정의론 부분은 솔직히 따라가기 어려웠다. 번역의 문제인지 내 이해력의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몇 페이지를 되풀이해 읽어도 확신이 서지 않는 대목이 있었다. 2500년 전의 텍스트를 현대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뭔가 빠지는 것이 있을 수밖에 없다. 원문을 읽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고대 그리스어는 내 영역 밖이다.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사치라는 생각도 들었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사람만이 좋은 삶이 무엇인지를 물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윤리학은 자유 시민을 위한 것이었지, 노예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 한계를 인식하면서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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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원저 Ἠθικὰ Νικομάχεια (기원전 4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