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 스타트업』 — 실패를 허락하는 방법에 대하여
연말에 동료가 건넨 책이었다. 읽어봤냐는 말도 없이, 책상 위에 슬쩍 올려두고 갔다. 표지가 낡아 있었다. 이미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듯했다. 모서리가 접혀 있었고, 형광펜 자국이 표지 안쪽까지 비쳐 보였다. 그 사람이 이 책을 내게 건넨 이유를 물어보지는 않았다. 다만 새해가 되어서야 겨우 펼쳤다.
솔직히 경영서는 잘 안 집는 편이다. 대개 제목이 너무 크거나, 결론이 너무 뻔하거나, 혹은 둘 다인 경우가 많아서다. 서점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경영서 코너를 지나칠 때면, 제목만으로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책들이 대부분이다. 성공한 사람의 습관, 위대한 기업의 비밀, 리더십의 정수. 그런 책들은 읽는 동안은 고개를 끄덕이게 하지만, 덮고 나면 머리에 남는 것이 별로 없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고급스럽게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좀 달랐다. 에릭 리스가 말하는 것은 성공의 비결 같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실패의 속도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떻게 하면 더 빨리 실패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처음에 좀 이상하게 들렸다. 실패를 더 빨리 하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읽어 나가면서 그 의미가 점점 선명해졌다.
핵심은 단순하다. 무언가를 만들 때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작은 형태로 먼저 내놓고 반응을 보라는 것이다. 최소 기능 제품이라고 부르는 것.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을 세상에 내놓는다는 것 자체가 많은 사람에게는 불안한 일이다. 부끄럽기도 하다. 그러나 에릭 리스는 그 부끄러움보다 더 나쁜 것이 있다고 말한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것을 완벽하게 만들어 놓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닫는 것. 그것이 진짜 부끄러운 일이라고.
이렇게 적으면 당연한 소리처럼 들린다. 그런데 막상 일을 하다 보면 이 당연한 것이 가장 어렵다. 회사에서 새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마다 비슷한 일이 반복된다. 기획서가 점점 두꺼워지고, 검토 회의가 늘어나고, 출시일이 밀린다. 완벽한 상태로 내놓겠다는 의지가 강할수록 세상에 나오는 시점은 늦어진다. 그리고 막상 나오면 시장은 이미 다른 곳을 보고 있다. 이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에릭 리스의 말이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에릭 리스는 이것을 낭비라고 부른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것을 완벽하게 만드는 데 들인 시간과 노력. 그가 보기에 진짜 낭비는 실패가 아니라, 실패를 너무 늦게 확인하는 것이다. 빨리 실패하고, 빨리 배우고, 빨리 방향을 바꾸는 것. 그것을 그는 피벗이라고 불렀다. 피벗은 포기가 아니다. 배움에 기반한 방향 전환이다. 이 구분이 중요하다. 포기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물러나는 것이지만, 피벗은 배운 것을 안고 다른 길로 가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어떤 불편함을 느꼈다. 회사라는 조직은 본질적으로 실패를 싫어한다. 실패의 비용을 감수하겠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실패가 일어났을 때 그것을 수용하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회의실에서는 모두가 혁신을 말하지만, 실제로 실패한 프로젝트의 담당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격려가 아니다. 책임 추궁이거나, 더 나쁜 경우에는 침묵이다. 그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배운다. 실패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아니, 더 정확히는, 실패가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에릭 리스는 스타트업 환경에서 이 방법론을 만들었지만, 정작 이 책이 가장 필요한 곳은 실패를 가장 두려워하는 큰 조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타트업은 이미 실패의 언저리에 서 있는 조직이다. 잃을 것이 적기 때문에 빠르게 시도하고 빠르게 방향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큰 조직은 다르다. 지킬 것이 많고, 바꾸는 데 드는 비용이 크고, 한 번의 실패가 여러 부서와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바로 그래서 큰 조직이 더 이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변화의 비용이 큰 곳일수록 잘못된 방향으로 오래 가는 것의 비용은 더 크다.
물론 이 책에도 한계는 있다. 모든 것을 빨리 만들고 빨리 시험해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리를 반만 짓고 반응을 볼 수는 없는 일이다. 병원을 절반만 완성해서 환자를 받을 수도 없다. 소프트웨어와 서비스에 최적화된 사고방식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또한 에릭 리스의 사례들은 대부분 실리콘밸리의 테크 스타트업이다. 그 세계의 규칙이 다른 세계에도 적용 가능한지는 별도의 질문이다.
그러나 책의 핵심이 방법론 자체보다 그 방법론을 가능하게 하는 태도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책의 사정거리는 스타트업보다 넓다. 그 태도란, 자기가 옳다는 확신을 잠시 내려놓는 것이다. 시장에 물어보는 것이다. 내가 만든 것을 세상이 원하는지,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을 세상에 밀어넣고 있는 것인지를 구분하는 것이다. 이것은 겸손이라기보다 정직에 가깝다. 자기 판단보다 현실의 신호를 먼저 보겠다는 정직.
이 정직은 생각보다 어렵다. 사람은 자기가 만든 것을 사랑하는 경향이 있다. 시간을 들이고 노력을 쏟은 것에 대해 객관적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시장의 반응이 나쁘면 시장이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객이 원하는 것을 주는 대신, 고객이 원해야 하는 것을 만든다. 에릭 리스가 경계하는 것은 바로 이 자기기만이다. 데이터가 말하는 것과 내가 믿고 싶은 것이 다를 때, 데이터를 선택하라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검증된 학습이라고 부른다.
두꺼운 기획서보다 얇은 시제품이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는 말이 오래 남았다. 돌이켜보면 일에서도, 일 바깥에서도, 가장 많이 배운 것은 오래 준비한 것에서가 아니라 일단 해본 것에서였다. 완벽한 준비란 대개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다. 준비가 더 필요하다는 말은, 아직 실패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뜻인 경우가 많다.
가벼운 책이었고, 이틀 만에 끝냈다. 읽고 나서 며칠 동안 책의 내용보다 동료의 얼굴이 더 자주 떠올랐다. 그 사람은 올해 초 새 프로젝트를 맡았다가 한 번 크게 좌절한 적이 있었다. 오래 준비한 것이 시장에서 외면받은 경우였다. 이 책을 건넨 것은 추천이었을까, 아니면 어떤 종류의 자조였을까. 물어보지는 않았다. 다만, 그가 이 책의 어떤 대목에 형광펜을 그었을까를 상상하면서 다시 한 번 책장을 넘겨보았다.
오랜만에 책을 한 권 끝까지 읽었다. 한동안 사두기만 하고 펴보지 못한 책들이 쌓여 있었는데, 이 책이 그 더미의 첫 번째 책이 되었다. 새해를 맞아 거창한 결심을 한 것은 아니다. 다만 책을 읽고 나면 머릿속에 잠시 떠다니는 생각들이 있는데, 그것이 다음 날이면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읽고 난 뒤의 생각들을 어딘가에 적어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은 그래서 쓴다. 다음에 또 적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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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리스
원저 The Lean Startup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