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 춤추는 사람과 생각하는 사람
이 소설에는 두 사람이 있다. 크레타 섬에서 탄광을 열겠다는 젊은 지식인과, 그 곁에 따라온 늙은 노동자 조르바. 한 사람은 생각하고, 한 사람은 살아간다. 이 소설의 거의 모든 것은 이 두 사람 사이의 거리에서 생겨난다.
화자인 젊은 지식인은 책을 좋아하고 사유를 좋아한다. 그의 세계는 머리 안에 있다. 현실의 일들은 그에게 관찰의 대상이지 참여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부처에 관한 원고를 쓰고 있고, 인생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탐구한다. 그의 사유는 깊지만, 그 깊이가 삶을 더 풍요롭게 하는지는 의문이다. 생각이 너무 많으면 행동이 줄어든다. 행동이 줄어들면 삶의 표면적이 줄어든다. 화자는 생각함으로써 오히려 삶에서 멀어지고 있다.
조르바는 다르다. 그는 글을 읽지 못하고, 철학을 모르고, 인생의 의미 같은 것에 관심이 없다. 대신 그는 살아간다. 고기를 구우면 온 마음으로 굽고, 술을 마시면 세상이 끝나는 듯 마시고, 춤을 추면 몸이 부서질 듯 춘다. 슬프면 춤추고, 기쁘면 춤추고, 뭔가 설명할 수 없을 때도 춤춘다. 조르바에게 삶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부딪치는 것이다. 그에게 삶은 문제가 아니라 경험이다. 풀어야 할 것이 아니라 겪어야 할 것이다.
이 둘의 관계가 이 소설의 전부다. 줄거리는 사실 별것 없다. 탄광은 잘 되지 않고, 섬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대부분 엉망이다. 마을에서 한 여인이 죽고, 조르바는 다른 여인과 사랑에 빠지고, 탄광 사업은 자꾸 어긋난다. 그러나 그 엉망인 일들 사이에서 조르바는 언제나 살아 있다. 그가 살아 있는 방식은 지식인이 책에서 읽었던 어떤 삶보다 압도적이다. 화자가 부처에 대해 사유하는 동안, 조르바는 부처가 평생 찾았던 것을 이미 살고 있다.
가장 마음에 남은 장면은 탄광이 무너지는 장면이다. 정성 들여 세운 케이블이 무너지고 나무가 쓸려 내려간다. 모든 것이 허사가 된 순간이다. 투자한 돈, 들인 시간, 쏟은 노력. 전부 산비탈 아래로 쓸려 내려갔다. 화자는 멍하니 서 있다. 실패 앞에서 얼어붙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런데 조르바는 다른 반응을 보인다. 그는 춤을 추기 시작한다. 모래밭 위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무너진 순간에 춤을 추다니. 그것이 현실 회피인가, 광기인가, 아니면 뭔가 다른 것인가. 읽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조르바의 춤은 슬픔의 춤도 기쁨의 춤도 아니다. 그냥 삶 그 자체에 대한 응답이다. 삶이 무너졌으니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무너져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에 대한 응답이다. 그 응답의 형식이 조르바에게는 춤이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글을 쓰고, 어떤 사람은 술을 마시고, 어떤 사람은 잠을 잔다. 조르바는 춤을 춘다. 그것이 그가 삶을 껴안는 방식이다.
읽으면서 불편했다. 조르바처럼 살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사는 사람이 몸으로 사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매일 아침 일어나 회사에 가고, 회의를 하고, 보고서를 쓰고, 밤에 집에 돌아와 책을 읽는 생활. 이 생활 속에서 조르바처럼 산다는 것이 가능한가. 아니, 가능한지의 문제가 아니라, 원하는지의 문제일 수도 있다. 조르바의 삶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에는 대가가 있다. 그는 가족을 잃었고, 돈이 없고, 미래를 계획하지 않는다. 그의 자유는 무책임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
이 소설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를 이상화하지도, 비판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 옆에 서서 자기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는 지식인의 시선을 보여줄 뿐이다. 화자는 끝까지 조르바가 되지 못한다. 다만 조르바 곁에서 잠시 다른 삶을 엿볼 뿐이다. 그 엿봄이 그를 변화시켰는지, 아니면 변화의 가능성만 보여주고 끝났는지는 소설이 끝난 뒤에도 알 수 없다.
카잔차키스가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것은 어쩌면 선택이 아니라 긴장이다. 생각하는 삶과 사는 삶 사이의 긴장. 책을 읽는 사람과 춤을 추는 사람 사이의 긴장. 사유의 깊이와 경험의 넓이 사이의 긴장. 이 긴장은 해소되지 않는다. 해소할 필요도 없다. 사유만으로는 삶이 메마르고, 경험만으로는 삶이 얕아진다. 둘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라면, 이 소설은 그 흔들림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주는 소설 중 하나다.
읽으면서 한 가지 질문이 계속 떠올랐다. 조르바는 책을 읽지 않는데, 화자는 조르바를 통해 배운다. 그렇다면 책을 통해 배우는 것과 사람을 통해 배우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책에서 얻는 지식은 간접적이고 안전하다. 책장을 덮으면 현실로 돌아올 수 있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얻는 지식은 직접적이고 위험하다. 그 사람이 당신의 세계를 흔들어 놓을 수 있다. 조르바는 화자의 세계를 흔들어 놓았다. 부처에 관한 원고를 쓰던 사람이, 부처보다 조르바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웠다는 역설. 그것이 이 소설의 핵심이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응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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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스 카잔차키스
원저 Βίος και Πολιτεία του Αλέξη Ζορμπά (19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