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 언어가 사라지면 사유도 사라진다
이 책은 학생 때 한 번 읽었다. 그때는 디스토피아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가 주는 흥미에 이끌려 읽었던 것 같다. 감시 사회, 전체주의, 빅 브라더. 텔레스크린이라는 장치가 주는 공포, 사상 경찰이라는 이름이 주는 섬뜩함. 그런 것들이 무섭고 흥미로웠다. 10대의 독서였다.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이에, 무서운 이야기로 읽었다.
다시 읽으니, 무서운 것의 정체가 달라져 있었다.
윈스턴 스미스는 진리부 기록국에서 일한다. 그의 업무는 과거의 신문 기사를 고쳐 쓰는 것이다. 당이 예측한 초콜릿 생산량이 틀리면, 예측 자체를 바꾼다. 과거의 신문에 실린 예측 수치를 실제 생산량에 맞추어 수정한다. 그러면 당은 틀린 적이 없게 된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맹이 되면, 어제의 기록에서 적이라는 단어를 동맹으로 바꾼다. 과거는 끊임없이 현재에 맞추어 재작성된다. 과거가 바뀌면 기억도 바뀐다. 기억이 바뀌면 진실은 사라진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이것이 오세아니아의 체제다.
처음 읽었을 때 가장 무서웠던 것은 텔레스크린이었다. 집 안에서까지 감시당한다는 것. 거실에 설치된 화면이 꺼지지 않고, 그 화면 너머에서 누군가가 당신을 보고 있다는 것. 이 공포는 직관적이다. 감시의 공포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다시 읽으니 진짜 무서운 것은 텔레스크린이 아니었다. 뉴스피크였다.
뉴스피크는 당이 만든 새로운 언어다. 올드스피크, 즉 기존의 영어에서 불필요한 단어를 제거하고, 남은 단어의 의미를 축소한다. 목표는 단순하다. 사유의 범위를 줄이는 것이다. 자유라는 단어가 사라지면, 자유라는 개념도 사라진다. 반역이라는 단어가 없으면 반역을 생각할 수 없다. 평등이라는 단어가 남아 있더라도, 그 의미가 물리적 동일성으로 축소되면 정치적 평등이라는 개념은 표현할 수 없게 된다.
오웰이 보여주려 한 것은, 사유란 결국 언어의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깊은 통찰이다. 우리는 말로 생각한다. 단어가 없으면 그 단어가 가리키는 것을 생각하기 어렵다. 물론 단어 없이도 느낌은 있을 수 있다. 불편함이나 분노 같은 것은 단어 이전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 느낌을 사유로 발전시키려면, 그것을 담을 언어가 필요하다. 뉴스피크는 바로 그 담을 그릇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오랫동안 책을 덮고 있었다. 감시 사회는 기술의 문제다. 기술은 양날의 검이어서, 감시에도 쓰이지만 감시에 저항하는 데도 쓰일 수 있다. 카메라를 설치하는 기술이 있으면 카메라를 무력화하는 기술도 있다. 그러나 언어의 축소는 다르다. 언어가 줄어든다는 것을 당하는 사람은 알 수 없다. 없어진 단어를 기억하려면 그 단어가 필요한데, 단어가 사라지면 기억할 수단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도둑이 들면 무엇을 잃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단어를 잃으면,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이것이 오웰이 상상한 완벽한 지배다.
소설 속에서 뉴스피크 사전을 편찬하는 사임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뉴스피크의 열렬한 지지자다. 그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매년 단어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고. 궁극적으로는 사상범죄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왜냐하면 범죄적 사상을 표현할 단어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사임은 이것을 진보라고 믿는다. 이 장면에서 느낀 오싹함은 텔레스크린보다 깊었다. 자유를 빼앗는 사람이 자유를 빼앗기는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 사임은 자신이 만드는 도구에 의해 결국 자신도 사유를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모른다. 알 수단이 없으니까.
윈스턴의 저항은 결국 실패한다. 그는 잡히고, 고문당하고, 다시 당을 사랑하게 된다. 101호실에서 그가 겪는 것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해체다. 그는 줄리아를 사랑했지만, 극한의 공포 앞에서 줄리아 대신 고문당하라고 말한다. 이 순간 그의 마지막 인간적 유대가 끊어진다. 그 이후에 남는 것은 빈 껍데기다. 당을 사랑하는 빈 껍데기.
이 결말이 처음 읽을 때는 비극이었다. 다시 읽으니, 그것은 비극이 아니라 논증이었다. 오웰은 전체주의가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이 아니다. 전체주의가 승리하는 메커니즘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그 메커니즘의 핵심은 폭력이 아니다. 폭력은 수단일 뿐이다. 핵심은 언어의 통제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의 범위를 좁히는 것. 상상할 수 있는 대안을 없애는 것. 대안이 없으면 현실은 받아들여야 할 유일한 것이 된다.
이 소설이 1949년에 쓰였다는 것이 놀라운 것은, 오웰이 미래를 예측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권력의 본질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권력은 사람을 굶기는 것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가서 생각의 지형도를 바꾸는 것으로 유지된다. 이것은 스탈린의 소련에서도, 히틀러의 독일에서도 시도된 일이었고, 형태를 바꾸어 지금도 어딘가에서 시도되고 있을 것이다.
1949년에 쓰인 소설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어쩌면 오웰이 너무 정확했기 때문에 오히려 시대를 초월하는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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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원저 Nineteen Eighty-Four (1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