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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12월. 22, 2019

『앵무새 죽이기』 — 아버지라는 이름에 대하여

연말에 읽은 책이다. 올해 읽은 책들 중 가장 조용한 책이었다. 국부론의 무게도, 1984의 공포도, 사피엔스의 야심도 없는 책이었다. 다만 한 마을, 한 가족, 한 재판의 이야기가 조용하게 흘러갈 뿐이었다. 그런데 그 조용함이 가장 깊었다.

이 소설의 화자는 여섯 살 소녀 스카웃이다. 아이의 눈으로 보는 세계는 단순하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옳은 것과 그른 것. 아이에게 세계는 아직 회색 지대가 없다. 그래서 어른들의 세계가 더 또렷하게 보인다. 어른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의 부조리가, 아이의 순진한 시선에서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스카웃이 사는 미국 남부의 작은 마을 메이컴에서 한 흑인 남성 톰 로빈슨이 백인 여성을 폭행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다. 스카웃의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가 그의 변호를 맡는다. 마을 사람들은 반대한다. 흑인을 변호하는 백인 변호사. 1930년대 미국 남부에서 이것은 단순한 직업적 선택이 아니다. 사회적 자살에 가까운 결정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긴 시간을 들여 읽은 것은 재판 장면이다. 애티커스가 법정에서 논리적으로, 차분하게, 증거를 하나씩 제시하는 장면. 톰 로빈슨의 왼팔이 불구라는 것, 피해자의 상처가 오른손잡이에 의한 것이라는 것, 피해자의 아버지가 왼손잡이라는 것. 사실들이 하나씩 쌓인다. 그의 변론은 빈틈이 없다. 법정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안다. 톰 로빈슨이 무죄라는 것을. 그런데 배심원들은 유죄를 선고한다.

이 장면에서 오래 멈추었다. 진실이 힘을 갖지 못하는 자리가 있다는 것. 증거가 분명하고, 논리가 완벽하고, 모든 사람이 진실을 알고 있는데도, 판결은 진실의 반대편으로 간다. 왜냐하면 진실보다 더 강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편견이다. 수백 년간 쌓여온 인종적 편견이 하루의 재판보다 무겁다. 한 변호사의 논리가 한 사회의 편견을 이길 수 없다.

이것은 법의 실패인가, 사회의 실패인가. 이 소설은 그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는다. 다만 법이 사회를 초월할 수 없다는 불편한 현실을 보여줄 뿐이다. 법은 사회 위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안에 박혀 있다. 법을 적용하는 것은 사람이고, 사람은 편견을 가지고 있다. 배심원들은 법을 어긴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옳다고 믿는 대로 판결한 것이다. 그 믿음이 잘못된 것이었을 뿐.

애티커스 핀치는 문학 속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 중 하나다. 그는 영웅이 아니다.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재판에서 지고, 마을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아이들은 학교에서 놀림을 당한다. 그의 삶은 이 사건 이후 더 어려워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위대한 것은, 질 것을 알면서도 해야 할 일을 하기 때문이다.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옳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이 태도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결과를 기대하지 않고 올바른 일을 하는 것. 이것은 이상주의인가, 현실주의인가. 언뜻 이상주의처럼 보인다. 질 것을 알면서 싸우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그러나 다르게 보면, 이것은 가장 현실적인 태도일 수도 있다. 결과에 의존하는 도덕은 결과가 나빠지면 무너진다. 그러나 과정에 기반한 도덕은 결과와 무관하게 유지된다. 애티커스는 톰 로빈슨을 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아이들에게 올바름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재판의 결과는 실패였지만, 교육의 결과는 성공이었다.

스카웃에게 애티커스가 한 말 중 하나가 머릿속에 남았다. 다른 사람을 진짜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피부 속으로 들어가서 걸어봐야 한다는 것. 이 말은 단순하지만, 그 단순함이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한다. 편견이란 결국 다른 사람의 피부 속으로 들어가 보지 않겠다는 거부에서 시작된다. 그 거부가 개인에게서 일어나면 무지가 되고, 사회에서 일어나면 차별이 되고, 법정에서 일어나면 부정의가 된다.

그리고 소설의 제목. 앵무새를 죽이는 것은 죄다. 앵무새는 아무 해도 끼치지 않고 다만 노래를 부를 뿐이니까. 아버지가 스카웃에게 총을 선물하며 한 말이다. 다람쥐를 쏘는 것은 괜찮지만, 앵무새를 쏘는 것은 죄라고. 이 소설에서 앵무새는 톰 로빈슨이다. 아무 해도 끼치지 않은 사람. 다만 잘못된 장소에,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피부색으로 존재했을 뿐인 사람. 그리고 앵무새는 이웃에 사는 괴짜 부 래들리이기도 하다. 마을 사람들의 편견과 소문에 갇혀 사는 사람.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사람들을 세상이 어떻게 다루는가. 그것이 이 소설의 질문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스카웃은 부 래들리의 손을 잡고 그를 집까지 데려다준다. 그리고 그의 현관에 서서 마을을 바라본다. 부 래들리의 시선으로 마을을 본다. 아버지가 말한 것, 다른 사람의 피부 속으로 들어가 걸어보는 것을 실천하는 순간이다. 이 작은 장면이 재판의 패배보다 더 큰 울림을 준다. 세상은 바뀌지 않았지만, 한 아이의 눈이 바뀌었다. 그것으로 충분한가.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변화는 한 사람의 눈이 바뀌는 것에서 시작된다.

올해가 끝나간다. 1월에 동료가 건넨 책으로 시작했고, 12월에 이 조용한 소설로 끝낸다. 열 권을 읽었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수다. 경영서에서 시작해 경제학을 거쳐 디스토피아를 지나 미국 남부의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그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읽은 이 책이 가장 담담했고, 그 담담함이 가장 깊었다.

올 한 해 읽은 책들의 기록을 이렇게 남겨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년에도 이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년에는 더 두꺼운 책, 더 어려운 책도 도전해보고 싶다. 책장에 아직 펼치지 못한 책들이 많이 남아 있다.

하퍼 리
원저 To Kill a Mockingbird (19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