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권 — 아버지를 죽이는 것에 대하여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야 한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그 두께 앞에서 번번이 물러났다. 이번에도 한참을 망설였다. 결국 펼친 것은, 올해 초에 사상서를 두 권 연달아 읽고 나서 소설이 그리워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소설이면서 동시에 사상서이기도 했다.
1권은 카라마조프 가문을 소개하는 데 상당한 분량을 할애한다. 아버지 표도르 카라마조프는 방탕하고, 인색하고,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인물이다. 그가 아버지라는 사실 자체가 이 소설의 비극의 씨앗이다. 세 아들 —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 — 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이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려 한다. 드미트리는 격정으로, 이반은 지성으로, 알료샤는 신앙으로.
처음 100페이지는 솔직히 힘들었다. 러시아 이름에 익숙해지는 데만 시간이 걸렸다. 같은 사람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가명도 있고, 존칭도 다르다. 인물 관계도를 따로 적어두고 읽었다. 그러나 일단 인물들이 머릿속에 자리를 잡으면, 이 소설은 놓기 어렵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은 살아 있다. 그들은 페이지 위에 인쇄된 글자가 아니라, 방금 옆방에서 소리를 지르고 나간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가장 강렬한 장면은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가족 회합이다. 표도르는 수도원이라는 신성한 장소에서도 방정을 떤다. 아들들 앞에서, 수도사들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인간인지를 과시하듯 보여준다. 이 장면의 불쾌함은 의도된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독자를 불편하게 만들어야 할 때 주저하지 않는다. 표도르 카라마조프는 혐오스러운 인물이지만, 단순하지 않다. 그의 방탕함에는 어떤 자기 파괴적인 정직함이 있다. 그는 위선을 모른다. 자기가 비천하다는 것을 알고, 그 비천함을 숨기지 않는다. 이 점에서 그는 오히려 정직한 인물이다. 불쾌하지만 정직한.
이반 카라마조프는 1권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이다. 그는 지식인이고, 무신론자이며, 도덕의 근거를 묻는 사람이다. 그가 던지는 질문은 이렇다. 만약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가. 이 질문은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다. 신이 도덕의 근거라면, 신을 부정하는 순간 도덕은 무너지는가. 아니면 신 없이도 도덕은 성립하는가.
이반의 「대심문관」 장이 1권의 절정이다. 이반이 알료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세비야에 예수가 다시 나타난다. 사람들은 기뻐한다. 그러나 대심문관, 즉 교회의 수장은 예수를 감옥에 가둔다. 그리고 밤새 예수에게 말한다. 당신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지만, 인간은 자유를 감당할 수 없다고. 인간은 자유보다 빵을 원하고, 자유보다 기적을 원하고, 자유보다 권위를 원한다고. 그래서 교회가 당신의 자유를 거두고 대신 질서를 주었다고.
이 장을 읽으면서 하이에크가 다시 떠올랐다. 하이에크도 같은 질문을 한 것이 아닌가. 자유는 좋은 것이지만, 인간은 정말 자유를 원하는가. 자유가 주는 불확실성과 책임을 감당하기보다, 누군가가 대신 결정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닌가. 대심문관은 그 바람에 응답한 사람이다. 자유를 거두고 빵과 질서를 주는 사람. 그리고 사람들은 그에게 감사한다.
이 이야기가 소설 속의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들어 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이반이 알료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무신론자가 신앙인에게 신의 실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그리고 알료샤는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이반에게 키스한다. 반박하지 않는다. 논리로 답하지 않는다. 다만 키스한다. 이 키스의 의미에 대해 아직도 생각하고 있다.
1권을 다 읽는 데 열흘이 걸렸다. 2권이 기다리고 있다. 이 소설이 어디로 가는지 아직 모른다. 다만 이 소설이 던지는 질문들이 단순한 소설적 장치가 아니라는 것은 느낀다. 이것은 소설의 형식을 빌린 철학이고, 철학의 무게를 가진 소설이다. 내달에 2권을 펼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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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원저 Братья Карамазовы (18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