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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5월. 24, 2020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2권 — 누가 아버지를 죽였는가

1권을 덮자마자 2권을 펼쳤다. 정확히는, 1권과 2권 사이에 이틀의 간격이 있었다. 그 이틀 동안 대심문관의 이야기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자유를 감당하지 못하는 인간. 빵과 기적과 권위를 원하는 인간. 이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 2권이 어디로 갈지 예측할 수 없었다.

2권은 표도르 카라마조프의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아버지가 죽는다. 그리고 드미트리가 체포된다. 증거는 그를 가리킨다. 동기도 있다. 아버지와 같은 여자를 사랑했고, 유산 문제로 다투었다. 드미트리는 격정적인 사람이다.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정말 그가 죽였는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리지만, 추리소설을 쓰지 않는다. 누가 죽였는가라는 질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왜 죽였는가, 그리고 누가 책임지는가. 이 소설에서 아버지의 죽음은 한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카라마조프 가문 전체의 귀결이다. 드미트리는 행위자일 수 있지만, 이반은 사상적 공범이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말한 사람. 그 말을 들은 스메르자코프가 실행에 옮겼을 수 있다.

재판 장면은 이 소설의 두 번째 절정이다. 1권의 절정이 대심문관이었다면, 2권의 절정은 법정이다. 여기서 도스토예프스키가 보여주는 것은 법의 한계다. 법은 행위를 심판할 수 있지만, 동기를 심판할 수 있는가. 사상을 심판할 수 있는가. 이반의 무신론이 스메르자코프를 움직였다면, 이반에게도 책임이 있는가. 법은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

작년 말에 읽은 『앵무새 죽이기』의 재판 장면이 떠올랐다. 두 소설 모두 법정에서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실패의 성격은 다르다. 앵무새 죽이기에서 정의가 실패한 것은 편견 때문이다. 배심원들이 진실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보지 않으려 한 것이다. 카라마조프에서 정의가 실패하는 것은 다른 이유다. 진실 자체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죽음에 여러 사람의 책임이 얽혀 있고, 행위와 사상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이반의 광기 장면은 읽으면서 숨이 막혔다. 이반은 자신의 논리에 의해 파괴된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명제를 끝까지 밀고 나간 결과가 광기다. 사상의 힘이 사상가를 삼켜버리는 것. 이것은 도스토예프스키가 무신론에 대해 내리는 판결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상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어디에 도달하는가에 대한 실험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반을 통해 무신론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무신론의 논리적 귀결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 알료샤는 다른 길을 간다. 그는 조시마 장로의 제자이고, 세상의 선함을 믿는 사람이다. 그러나 알료샤의 신앙은 단순하지 않다. 그는 의심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이반의 대심문관 이야기를 듣고 흔들렸고, 조시마 장로가 죽었을 때 절망했다. 그의 신앙은 의심을 거친 신앙이다. 그래서 더 단단하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나서 한참 동안 아무 책도 집지 못했다. 이 소설이 남기는 잔상이 너무 강해서, 다른 책의 문장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은 극단적이다. 극단적으로 격정적이고, 극단적으로 지적이고, 극단적으로 선하다. 현실의 사람은 이렇게 극단적이지 않다. 그러나 현실의 사람 안에도 이 극단들이 조금씩 들어 있다. 드미트리의 충동, 이반의 회의, 알료샤의 선의. 우리 안에도 이 세 형제가 있다.

인간은 자유를 감당할 수 있는가. 대심문관의 질문이 소설이 끝난 뒤에도 남아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답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답은 알료샤의 키스에 있었을 것이다. 논리로 답할 수 없는 질문에 대한 응답은 논리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 그것이 너무 순진한 답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방대한 소설을 다 읽고 나면, 그 순진함이 오히려 가장 정직한 답처럼 느껴진다.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원저 Братья Карамазовы (18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