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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 6월. 14, 2020

『죽음의 수용소에서』 — 마지막 자유

이 책은 얇다. 200페이지도 안 된다. 그런데 그 얇은 페이지들이 견디는 무게는 내가 읽은 어떤 두꺼운 책보다 무겁다.

빅터 프랭클은 정신과 의사였다. 비엔나에서 개업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대인이었다. 1942년, 그는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다. 아내, 아버지, 어머니, 형제가 수용소에서 죽었다. 그 자신은 살아남았다. 이 책은 그 경험에 대한 기록이자, 그 경험에서 길어 올린 사유다.

프랭클이 수용소에서 관찰한 것은 인간의 극한이었다. 매일 죽음의 가능성 앞에 선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어떤 사람은 무너졌고, 어떤 사람은 버텼다. 여기서 프랭클이 발견한 것은 놀라운 것이었다. 버틴 사람과 무너진 사람의 차이는 체력이 아니었다. 건강한 사람이 먼저 죽기도 했고, 쇠약한 사람이 끝까지 살아남기도 했다. 차이는 의미였다.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 즉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사람이 버텼다.

이 관찰에서 프랭클은 로고테라피라는 심리치료 이론을 만들었다. 프로이트가 인간의 근본 동기를 쾌락으로 보았고, 아들러가 권력으로 보았다면, 프랭클은 의미로 본다.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는 존재도, 권력을 추구하는 존재도 아니다.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다. 의미가 없을 때 인간은 무너진다. 쾌락과 권력이 있어도 의미가 없으면 공허하다.

이 이론이 수용소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이 책의 무게다. 학문적 추론이 아니라 극한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프랭클 자신이 실험 대상이었고, 동시에 관찰자였다. 자기 안에서 의미가 사라져가는 것을 느끼면서, 동시에 그 과정을 분석하고 있었다. 이 이중성이 이 책에 독특한 긴장을 준다.

가장 깊이 박힌 문장은 이것이었다.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지만, 단 하나,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자유만은 빼앗을 수 없다는 것. 이것이 프랭클이 말하는 마지막 자유다. 수용소에서 음식을 빼앗기고, 옷을 빼앗기고, 이름을 빼앗기고, 존엄을 빼앗겨도, 이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자유는 남는다. 이것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마지막 보루다.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인간이 자유를 감당하지 못한다는 오래된 주장이 떠올랐다. 프랭클은 반대로 말한다. 가장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에게는 자유가 남는다고. 그리고 그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프랭클은 수용소에서 한 가지를 반복했다고 쓴다. 해방된 후에 자신의 경험을 강의하는 장면을 상상한 것이다. 따뜻한 강의실에서 학생들 앞에 서서, 수용소의 심리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신을 상상했다. 이 상상이 그에게 의미를 주었다. 그의 고통에 목적을 부여했다. 고통 자체는 견딜 수 없지만, 목적이 있는 고통은 견딜 수 있다.

니체의 문장을 프랭클은 여러 번 인용한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는 것. 이 문장이 이 책 전체의 요약이다. 왜를 아는 사람은 어떤 어떻게도 견딘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며칠 동안 일상이 다르게 느껴졌다. 아침에 마시는 커피,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 에어컨이 나오는 사무실. 이 모든 것이 수용소의 관점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호사다. 이런 비교가 유효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극한의 고통과 일상의 편안함을 같은 저울에 올리는 것이 공정한지도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내가 불평하는 것들이 얼마나 작은 것인지를.

그러나 프랭클은 이런 비교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감사하라는 것이 아니다. 의미를 찾으라는 것이다. 편안한 삶에도 의미는 필요하다. 어쩌면 편안한 삶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더 어려울 수도 있다. 고통 속에서는 생존 자체가 의미가 된다. 그러나 생존이 위협받지 않는 삶에서는,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현대인의 과제일 것이다.

여름이 시작되고 있다. 얇은 책이었지만, 오래 갈 것 같다.

빅터 프랭클
원저 …trotzdem Ja zum Leben sagen: Ein Psychologe erlebt das Konzentrationslager (19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