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 — 상실을 안고 살아가는 법
하루키를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름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읽어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다. 유행하는 작가에 대한 막연한 경계심 같은 것이 있었다. 모두가 좋다고 하는 책은 오히려 손이 가지 않는다. 이번에 집어든 것은, 연말의 어떤 감상적인 기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와타나베 도루는 대학생이다. 그의 주변에서 사람들이 죽는다. 가장 친한 친구 기즈키가 자살하고, 기즈키의 연인이었던 나오코가 정신을 앓다가 결국 죽는다. 이 소설은 그 죽음들 사이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이야기다. 죽은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은 사람의 이야기. 상실을 겪은 뒤에도 계속되는 일상. 그 일상의 무게.
하루키의 문체는 독특하다. 건조하고, 정확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감정을 직접 서술하지 않는다. 대신 행동을 서술한다. 와타나베가 무엇을 먹었고, 어디를 걸었고, 무슨 음악을 들었는지를 적는다. 그 행동의 디테일 사이에서 감정이 스며 나온다. 슬프다고 쓰지 않지만, 읽는 사람은 슬프다. 이것이 하루키의 기법이다.
나오코는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위태로운 인물이다. 기즈키가 죽은 뒤 그녀는 세상과의 접점을 하나씩 잃어간다. 와타나베는 그녀를 붙잡으려 하지만, 붙잡을 수 없다. 사랑으로 사람을 구할 수 있는가. 이 소설의 대답은 아니오다. 사랑은 사람을 구하지 못한다. 사랑은 사람 곁에 있어줄 수는 있지만, 그 사람 안의 어둠까지 밝히지는 못한다.
이 대답이 잔인하게 들릴 수 있지만, 오히려 정직하다.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서사는 위로가 되지만 거짓이다. 사랑해도 구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곁에 있어도 닿을 수 없는 곳이 있다. 나오코가 있는 곳은 와타나베가 닿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 닿을 수 없음 앞에서 와타나베가 느끼는 무력감이 이 소설의 핵심이다.
미도리라는 인물이 나오코의 대비점으로 등장한다. 나오코가 죽음 쪽에 있는 사람이라면, 미도리는 삶 쪽에 있는 사람이다. 밝고, 직설적이고, 생명력이 넘친다. 와타나베는 나오코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미도리에게 끌린다. 이 갈등이 소설의 또 다른 축이다. 죽은 자에 대한 충성과 산 자에 대한 욕망 사이에서 찢어지는 것. 과거에 묶인 사랑과 미래를 향한 사랑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것.
하루키는 이 선택을 극적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나오코가 죽고, 와타나베는 방황하고, 결국 미도리에게 전화를 건다. 그것이 전부다. 대단한 결심도, 드라마틱한 장면도 없다. 다만 한 사람이 상실을 안고 다시 살아가기 시작하는 것. 그 시작이 전화 한 통이라는 것. 이 절제가 하루키의 힘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와타나베는 전화기를 들고 미도리에게 묻는다.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그리고 그 자신도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장면이 소설의 마지막이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것. 이 어긋남 속에 이 소설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읽으면서 비틀즈의 「Norwegian Wood」를 찾아 들었다. 이 곡이 소설의 제목이자 나오코의 기억과 연결된 곡이다. 멜로디가 담담하다. 슬프지도, 밝지도 않은 톤. 이 곡의 톤이 소설의 톤과 정확히 일치한다.
올해가 끝나간다. 2020년은 어려운 해였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 그 변화 속에서 책은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올해 읽은 책들이 한 해 안에 겹겹이 쌓여 있다. 내년에도 계속 읽을 것이다. 읽고, 생각하고, 적는 것. 이것이 이 블로그의 전부이고, 이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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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원저 ノルウェイの森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