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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정치 · 3월. 14, 2021

『국가』 — 철인왕이라는 위험한 꿈

플라톤의 『국가』를 읽었다. 서양 철학의 모든 것이 플라톤의 각주라는 말이 있다. 과장이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그 과장이 이해된다.

이 책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소크라테스가 여러 사람과 대화하면서 정의의 본질을 탐구한다. 대화체로 쓰여 있어서 읽기 쉬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소크라테스의 논증은 정교하고, 상대방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한 페이지를 읽고 다시 되돌아가 읽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플라톤이 제시하는 이상 국가의 핵심은 철인왕이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통치해야 한다는 것. 철학을 수련한 사람, 진리를 아는 사람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 이 주장은 직관적으로 그럴듯하다. 어리석은 사람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통치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주장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근본적인 문제가 보인다. 누가 가장 지혜로운 사람을 결정하는가. 그 결정은 누구의 판단에 의해 이루어지는가. 그리고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통치자가 된 뒤, 그의 지혜가 잘못되었다면 누가 그를 교정하는가. 철인왕이라는 아이디어의 매력은 동시에 그 위험이다. 완벽한 통치자를 전제하는 모든 시스템은, 그 통치자가 완벽하지 않을 때 붕괴한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이 책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이다. 동굴 안에 갇힌 사람들이 벽에 비친 그림자만 보고 그것이 현실이라고 믿는다. 한 사람이 사슬을 풀고 동굴 밖으로 나와 햇빛을 본다. 처음에는 눈이 부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점차 적응하면서 진짜 세계를 보게 된다. 그리고 동굴로 돌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려 하지만, 그들은 믿지 않는다.

이 비유가 2천 년 넘게 살아남은 이유는, 그것이 진리의 문제만이 아니라 소통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를 전달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동굴 밖을 본 사람은 동굴 안의 사람을 설득할 수 없다. 왜냐하면 동굴 안의 사람에게는 그림자가 현실이기 때문이다. 경험하지 않은 것을 이해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 비유를 정치에 적용하면 위험해진다. 자신이 동굴 밖을 보았다고 믿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깨우치겠다고 나서는 것. 이것이 철인왕의 논리이고, 역사적으로 수많은 독재자가 사용한 논리이기도 하다. 나는 진리를 알고, 당신들은 모른다. 그러니 나를 따르라. 플라톤이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철인왕의 아이디어는 이런 식으로 악용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플라톤은 틀렸는가. 단순히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플라톤이 살았던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소크라테스를 사형시킨 민주주의였다. 다수의 의견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플라톤의 통찰은 정당하다. 문제는 그 대안이다. 다수의 어리석음을 교정하기 위해 소수의 지혜에 의존하는 것은, 다수의 어리석음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그렇다면 플라톤은 틀렸는가. 단순히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플라톤이 살았던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소크라테스를 사형시킨 민주주의였다. 독배를 마시게 한 것은 폭군이 아니라 다수의 시민이었다. 다수의 의견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플라톤의 통찰은 정당하다. 민주주의에는 다수의 횡포라는 위험이 내재되어 있다. 이것은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관찰하면서도 지적한 것이다. 플라톤은 이 위험을 2천 년 전에 이미 보았다.

문제는 그 대안이다. 다수의 어리석음을 교정하기 위해 소수의 지혜에 의존하는 것은, 다수의 어리석음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소수가 현명하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소수가 현명하더라도, 그 현명함이 영속적이라는 보장은 어디에 있는가. 오늘 현명한 사람이 내일도 현명할 것인가. 권력이 사람을 바꾸지는 않는가.

하이에크의 통찰이 여기서 빛난다. 하이에크가 경계한 것은 누가 통치하느냐가 아니라, 통치의 범위를 어떻게 제한하느냐였다. 현명한 사람이 통치하든 어리석은 사람이 통치하든, 통치의 범위가 제한되어 있으면 피해를 줄일 수 있다. 반대로 아무리 현명한 사람이라도 무제한의 권력을 가지면 위험하다. 플라톤은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를 물었고, 하이에크는 통치가 어디까지 미쳐야 하는가를 물었다. 두 질문은 다른 질문이지만, 둘 다 중요하다.

이 책에서 또 하나 깊이 생각하게 된 것은 정의의 정의에 관한 부분이다. 소크라테스는 여러 정의의 정의를 검토하고 반박한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 정의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라는 주장, 정의는 각자에게 마땅한 것을 주는 것이라는 주장. 소크라테스는 이 모든 정의를 해체한 뒤에, 자기 자신의 정의를 제시한다. 정의는 영혼의 조화라는 것. 영혼의 세 부분 — 이성, 기개, 욕망 — 이 각자의 자리를 지킬 때 정의로운 영혼이 되고, 국가의 세 계급 —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 — 이 각자의 자리를 지킬 때 정의로운 국가가 된다.

이 비유가 아름다운 동시에 위험한 이유는, 각자의 자리라는 것을 누가 정하는가라는 질문 때문이다. 생산자가 생산자의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계급의 고정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자기 자리에 만족하라는 말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말이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말이 아니다.

2천 년 전의 질문이 여전히 유효하다.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완벽한 답은 아직 없다. 아마 영원히 없을 것이다. 다만 완벽한 답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은 배웠다. 플라톤의 철인왕이든, 현대의 전문가 통치론이든, 소수가 다수보다 낫다는 주장에는 항상 같은 위험이 따른다. 그 소수가 틀릴 때 교정할 방법이 없다는 위험.

플라톤
원저 Πολιτεία (기원전 375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