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변명』 — 죽음 앞에서의 말
이 책은 짧다. 한 시간이면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한 시간 동안 읽는 것은 한 사람의 마지막 변론이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말. 그리고 사형 선고를 받은 뒤의 말. 죽음 앞에서 한 사람이 어떻게 말하는가. 이것이 이 짧은 텍스트의 전부이고,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소크라테스가 기소된 죄목은 두 가지다. 아테네의 신들을 믿지 않고 새로운 신을 도입한 것, 그리고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것. 이 죄목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다르다. 소크라테스가 진짜로 기소된 이유는 그가 아테네의 권력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시장에서, 체육관에서, 연회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정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용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질문을 받으면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깨달음이 불쾌하다. 특히 자기가 현명하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은, 자신이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는 신탁에 대한 이야기다. 델포이의 신탁이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한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현명하다고 알려진 사람들을 찾아가 대화했다. 정치가, 시인, 장인. 그런데 대화해보니 그들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모르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적어도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이 그를 가장 현명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무지의 자각.
소크라테스의 지혜는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었다. 한 사람이, 혹은 한 집단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믿음이 위험하다는 것. 이 인식론적 겸손이 2천 년을 넘어서도 유효하다.
변론의 끝부분에서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놀라운 말을 한다.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 죽음이 무인지 아무도 모른다. 깊은 잠일 수도 있고, 다른 세계로의 이동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 죽음 앞에서의 이 평온이 인상적이다. 소크라테스의 평온은 자기 삶의 일관성에서 온다. 내가 옳다고 믿는 대로 살았으니, 죽음 앞에서도 태도를 바꿀 이유가 없다는 것.
소크라테스는 도망칠 수 있었다. 친구들이 탈출을 준비해두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거부했다. 아테네의 법이 자신을 사형시키기로 했으니, 그 법을 따르겠다는 것이다. 법이 부당하더라도, 법을 어기는 것은 법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이 논리가 매끄러운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부당한 법에 복종하는 것이 옳은가. 소로우는 시민 불복종을 주장했다. 부당한 법에 복종하는 것은 그 부당함에 가담하는 것이라고. 소크라테스와 소로우는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했다.
이 짧은 텍스트를 읽고 나서 한참 동안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말을 생각했다. 떠날 시간이 왔다, 나는 죽으러 가고 당신들은 살러 간다, 어느 쪽이 더 나은 운명인지는 신만이 안다. 이 말의 무게. 죽으러 가는 사람이 사는 사람을 위로하는 장면. 이것은 문학이 아니라 기록이다. 실제로 한 말이다. 그래서 더 무겁다.
이 짧은 텍스트가 가진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소크라테스의 논증이 뛰어나서? 물론 그렇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이 텍스트의 힘은, 말하는 사람이 죽음 앞에 서 있다는 사실에서 온다. 죽음 앞에서 하는 말은 다른 무게를 가진다.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 인상을 관리할 필요도 없다. 남은 것은 진심뿐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2천 년을 살아남은 것은, 그것이 한 사람의 마지막 진심이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가끔 발표를 할 때,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떠올린 적이 있다. 물론 비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청중 앞에서 자기가 믿는 것을 말하는 것, 그 말이 인기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하는 것, 이런 상황은 규모와 무관하게 비슷한 긴장을 준다. 소크라테스가 보여준 것은 용기다. 다만 그 용기가 주먹을 휘두르는 용기가 아니라 말하는 용기라는 점이 중요하다. 진실을 말하는 용기. 이것이 가장 어려운 용기일 수 있다.
말의 힘이란 그런 것이다. 몸은 사라져도 말은 남는다. 그리고 그 말이 진심일 때, 시간을 넘어서 닿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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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원저 Ἀπολογία Σωκράτους (기원전 399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