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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12월. 18, 2022

『레미제라블』 — 법과 은총 사이에서

축약본으로 읽었다. 원전은 5권이 넘는 대작이고, 이 글을 쓸 수 있는 나이 안에 다 읽을 자신이 없었다. 축약본이라 해도 상당한 분량이었고, 빠진 부분이 아쉽기는 하지만, 핵심적인 서사는 충분히 담겨 있었다.

장 발장의 이야기는 알려져 있다. 굶주린 조카를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간 감옥에 갇힌 사람. 출소 후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한 주교의 은총으로 새 삶을 시작하는 사람. 이 이야기가 150년 넘게 읽히고, 뮤지컬이 되고, 영화가 되는 이유는 단순하다. 인간이 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감동적인 답이기 때문이다.

미리엘 주교가 장 발장에게 은촛대를 건네는 장면은 문학에서 가장 강력한 은총의 장면 중 하나다. 장 발장이 주교의 집에서 은식기를 훔쳐 도망쳤다. 경찰이 그를 잡아 주교 앞에 데려왔다. 주교는 말한다. 그것은 내가 준 것이다. 그리고 은촛대까지 더 준다. 이 행위가 장 발장의 삶을 바꾼다. 법은 장 발장을 범죄자로 만들었지만, 은총이 그를 인간으로 되돌려놓았다.

자베르라는 인물이 이 소설의 또 다른 축이다. 자베르는 법의 화신이다. 법은 절대적이고, 범죄자는 영원히 범죄자라는 믿음의 사람이다. 장 발장은 과거에 범죄를 저질렀으니, 영원히 범죄자다. 이것이 자베르의 논리다. 법의 논리다. 그런데 장 발장이 변했다면? 선한 사람이 되었다면? 자베르의 세계관에서 이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법은 변하지 않는다.

장 발장과 자베르의 대립은 은총과 법의 대립이다. 용서와 정의의 대립이다. 위고는 이 대립을 단순한 선악의 대결로 그리지 않는다. 자베르도 나름의 정의를 가지고 있다. 그는 법을 사랑한다. 법이 없으면 질서가 없고, 질서가 없으면 사회가 무너진다고 믿는다. 이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문제는 그 믿음이 유연성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베르가 결국 무너지는 것은, 장 발장이 그를 살려준 순간이다. 장 발장은 자베르를 죽일 수 있었지만 풀어준다. 이 행위가 자베르의 세계를 붕괴시킨다. 범죄자가 선을 행했다. 법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자베르는 이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세느 강에 몸을 던진다.

이 장면에서 오래 머물렀다. 자베르의 죽음은 비극이다.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다만 자기의 세계관 안에 갇힌 사람이다. 법이 전부인 사람에게, 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은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현실 대신 자기를 부정한다. 이것은 관념의 비극이다. 하나의 원칙에 너무 충실한 사람이 겪는 비극.

법은 일반적 규칙이다. 그런데 삶은 개별적이다. 일반적 규칙으로 모든 개별적 상황을 다룰 수 없다. 이 간극에서 은총이 필요해진다. 법 너머의 자비, 규칙 너머의 인간적 판단. 자베르에게 없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위고의 문체는 장대하다. 축약본에서도 그 장대함이 느껴진다. 한 인물의 삶을 수십 년에 걸쳐 추적하면서, 프랑스 사회 전체를 캔버스로 쓴다. 파리의 하수도, 워털루 전투, 1832년의 바리케이드. 개인의 이야기와 역사의 이야기가 교차한다. 이런 규모의 소설이 감동적인 이유는, 규모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규모 안에서 한 사람의 변화가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또 다른 축인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사랑 이야기도 빠뜨릴 수 없다. 장 발장이 코제트를 키우면서 보여주는 아버지적 사랑. 코제트가 마리우스를 사랑하면서 장 발장의 품을 떠나는 것. 장 발장은 코제트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지만, 코제트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이것이 사랑의 비극이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다. 사랑한 사람이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사랑의 일부다. 장 발장이 마지막에 홀로 죽어가는 장면은, 축약본에서도 가슴이 아팠다.

바리케이드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1832년의 파리. 젊은이들이 바리케이드를 쌓고 정부군에 맞서 싸운다. 이 봉기는 실패한다. 역사적으로도 실패한 봉기다. 위고는 이 실패한 봉기를 영웅적으로 그린다. 이기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싸우는 것. 앵무새 죽이기의 애티커스처럼, 결과가 아니라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것.

올해가 끝난다. 4년째 이 블로그를 쓰고 있다. 올해는 니체를 완결하고, 헤세를 만나고, 도킨스를 거쳐 위고에 도달했다. 철학에서 역사로, 과학에서 문학으로. 이 여정에 일관성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매 책이 다른 각도에서 이 질문에 답한다. 내년에도 이 질문을 안고 계속 읽을 것이다.

빅토르 위고
원저 Les Misérables (18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