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산책』 — 걸으면서 읽는 것에 대하여
가벼운 책이 필요한 시기가 있다. 니체를 읽고, 토지를 읽고 나서 머릿속이 무거웠다. 사상과 역사와 인간의 어두운 면을 연속으로 마주한 뒤라, 그냥 예쁜 문장을 읽고 싶었다. 머리로 읽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읽는 책. 분석하지 않아도 되는 책. 한정원의 『시와 산책』은 그런 자리에 딱 맞는 책이었다.
이 책은 시에 대한 에세이다. 시를 해석하는 책이 아니라,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시에 대해 쓴 감상이다. 학술적이지 않다. 전문적이지도 않다. 다만 시를 읽고, 걷고, 생각한 기록이다. 산책과 시가 번갈아 나온다. 걷다가 떠오르는 시구, 시를 읽다가 떠오르는 풍경. 이 교차가 이 책의 리듬이다.
산책과 독서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소로우도 월든에서 많이 걸었다. 니체도 걸으면서 사유했다고 한다. 걷는 것과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연결이 있다. 책상 앞에 앉아서 하는 생각과 걸으면서 하는 생각은 다르다. 앉아서 하는 생각은 수렴적이다. 답을 향해 좁혀간다. 걸으면서 하는 생각은 발산적이다. 생각이 어디로 갈지 모른다. 이 예측 불가능성이 산책의 매력이고, 시의 매력이기도 하다.
한정원의 문장은 조용하다. 주장하지 않는다. 분석하지 않는다. 그냥 느낀 것을 적는다. 이 조용함이 지난 몇 달간 읽은 책들의 시끄러움 — 니체의 도발, 도스토예프스키의 격정, 플라톤의 논증 — 과 좋은 대비를 이루었다. 모든 책이 무거울 필요는 없다. 모든 글이 깊을 필요도 없다. 때로는 수면 위를 미끄러지듯 가는 책이 필요하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남은 것은 시를 읽는 속도에 대한 이야기였다. 시는 느리게 읽어야 한다. 한 줄을 읽고, 멈추고, 다시 읽고, 또 멈추는 것. 소설의 속도로 시를 읽으면 시가 보이지 않는다. 소설은 앞으로 나아가는 형식이다.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서 넘기는 것. 시는 다르다. 시는 한 자리에 머무는 형식이다. 한 줄에 오래 서 있는 것. 그 줄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것.
시는 행간에 있다. 쓰여 있는 것보다 쓰여 있지 않은 것이 더 많은 형식이다. 좋은 시는 말하지 않는 것으로 말한다. 침묵이 언어의 일부가 되는 형식. 이것은 산문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산문은 채우는 것이고, 시는 비우는 것이다. 비움으로써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에 독자가 자기의 경험을 채운다. 같은 시를 읽어도 사람마다 다른 것이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은 어쩌면 이 블로그에서 하려는 것과도 통한다. 책을 읽고, 멈추고, 생각하고, 적는 것. 빠르게 많이 읽는 것보다 느리게 깊이 읽는 것. 한 달에 한 권을 읽고 한 편의 글을 쓰는 것. 이 속도가 시를 읽는 속도와 비슷하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깨달았다.
한정원이 인용하는 시인들 — 윤동주, 정현종, 김수영, 백석 — 의 시구들이 산책의 풍경과 어우러진다. 시구를 읽고, 걷고, 다시 시구를 떠올리는 것. 이 반복이 이 책의 리듬이다. 특별한 주장이 없다. 대단한 해석도 없다. 다만 시와 함께 걷는 사람의 발걸음이 있을 뿐이다. 그 발걸음의 속도가 편안하다.
산책과 독서를 연결하는 것은 새로운 생각이 아니다. 소로우도 월든에서 많이 걸었다. 니체도 알프스를 걸으면서 사유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파를 소요학파라고 부르는 것도 걸으면서 가르쳤기 때문이다. 걷는 것과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오래된 연결이 있다. 한정원의 책은 그 연결에 시를 더한 것이다.
걷는 것이 사유에 도움이 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책상 앞에 앉아서 하는 생각과 걸으면서 하는 생각은 다르다. 앉아서 하는 생각은 수렴적이다. 문제를 향해 좁혀간다. 답을 찾으려 한다. 걸으면서 하는 생각은 발산적이다. 생각이 어디로 갈지 모른다. 풍경이 바뀌면서 생각도 바뀐다. 바람이 불면 생각도 흔들린다. 이 예측 불가능성이 산책의 매력이고, 시의 매력이기도 하다. 시도 예측할 수 없다. 다음 줄이 어디로 갈지 모른다. 이 점에서 시와 산책은 같은 운동이다.
이 책의 효용은 거창하지 않다. 걸을 때 좀 더 주변을 보게 되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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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