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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2월. 20, 2022

『토지』 1권 — 땅과 사람과 운명

한국 소설을 이 블로그에서 다루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박경리의 『토지』. 한국 문학의 대하소설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작품이다. 전체 5부 16권. 그 가운데 1권만 먼저 읽었다. 전체를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1권만으로도 충분히 무거운 경험이었다.

1권의 배경은 19세기 말 경상남도 하동의 평사리다. 최참판댁이라는 대지주 가문을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의 삶이 펼쳐진다. 시대는 조선 말기. 나라가 흔들리고 있지만, 평사리에서는 아직 그 흔들림이 직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징후들이 있다.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문들, 새로운 세력의 등장, 전통적 질서의 균열.

박경리의 문장은 서양 소설과 다르다. 묘사가 느리고, 풍경이 길고, 인물의 감정은 행동과 대화 속에 묻혀 있다. 처음 50페이지는 적응하기 어려웠다. 리듬이 다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격정도, 하루키의 건조함도 아닌, 한국 특유의 느린 호흡이 있다. 이 호흡에 일단 적응하면, 그 느림 속에서 사람들의 삶이 천천히 드러난다.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서희다. 아직 1권에서는 어린아이지만, 이 아이의 눈에 비친 세계가 소설의 또 다른 시선이 된다. 어른들의 욕망과 갈등을 아이가 보는 것. 아이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느낀다. 이 느낌이 소설에 독특한 질감을 준다. 앵무새 죽이기의 스카웃이 떠올랐다. 아이의 시선이 어른의 세계를 비추는 것.

이 소설의 중심에 있는 것은 땅이다. 제목 그대로 토지. 최참판댁의 권력은 땅에서 나온다. 땅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관계가 이 소설의 모든 갈등을 만든다. 소작인의 삶, 머슴의 삶, 종의 삶. 땅에 묶인 사람들의 이야기. 이것은 한국 근대사의 축소판이다.

서양의 자유주의 사상을 읽으면서 형성된 시각으로 이 소설을 보면, 소유권의 문제가 눈에 들어온다. 아담 스미스가 말한 시장 경제는 소유권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토지에서 보여주는 세계에서 소유권은 권력 그 자체다. 땅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시장이 없는 세계. 교환이 아니라 지배의 논리가 작동하는 세계. 이 세계에서 자유는 땅을 가진 자의 전유물이다.

박경리가 이 세계를 그리는 방식은 고발도 아니고 미화도 아니다. 그냥 보여줄 뿐이다. 최참판댁의 사람들도, 소작인들도, 각자의 논리로 살아간다. 선과 악의 도식이 아니라 삶의 복잡함이 있다. 이 복잡함이 이 소설의 힘이다. 대하소설이 단순한 스토리가 아니라 세계 자체를 담을 수 있는 형식인 이유다.

박경리의 인물들은 도식적이지 않다. 최참판댁의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악하지 않고, 소작인들이 일방적으로 선하지 않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논리로 살아간다. 최치수의 탐욕은 나쁘지만, 그 탐욕의 뿌리에는 불안이 있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자기 것을 지키려는 불안. 소작인들의 고통은 분명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도 사랑과 질투와 웃음이 있다.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온전히 비참하지만은 않다. 삶은 계속되고, 삶이 계속되는 한 희로애락도 계속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떠올린 것은, 서양 소설과 한국 소설의 차이였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은 극단적이다. 이반은 극단적으로 지적이고, 드미트리는 극단적으로 격정적이다. 박경리의 인물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일상적이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들에 나가 일하고, 저녁에 돌아와 잠을 잔다. 이 일상의 반복 속에서 드라마가 천천히 일어난다. 이 속도가 한국 소설의 리듬이다. 서양 소설의 리듬과 다르다. 어느 쪽이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른 것이다.

땅에 대한 이 소설의 시선은 서양 경제학의 시선과도 다르다. 아담 스미스에게 토지는 생산 요소 중 하나다. 자본, 노동과 나란히 놓이는 것. 박경리에게 토지는 생산 요소가 아니라 존재의 근거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이 삶이다. 그 땅에서 떠나는 것은 삶의 상실이다. 이 차이는 농경 사회와 산업 사회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땅을 보는 동양적 시선과 서양적 시선의 차이다.

겨울이 끝나가고 있다. 한국의 땅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가 서 있는 이 땅에 대해 생각했다. 이 땅 위에 쌓인 역사, 이 땅 위에서 살아간 사람들. 서울의 아파트에 살면서 토지를 읽는 것은 묘한 경험이다. 이 아파트 아래에도 한때 논이었던 자리가 있을 것이다. 그 논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남아 있지 않다. 박경리가 쓴 것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다.

2권을 읽을지는 아직 모르겠다. 16권은 너무 멀다. 그러나 1권만으로도 이 소설이 왜 한국 문학의 기념비적 작품인지는 충분히 느꼈다.

박경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