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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9월. 19, 2021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에서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소설이면서 동시에 철학적 에세이다. 첫 장부터 니체의 영원회귀를 이야기한다. 만약 삶이 한 번만 일어나는 것이라면, 그것은 가벼운 것인가 무거운 것인가. 한 번뿐인 삶은 되돌릴 수 없으니 무겁다. 그러나 한 번뿐이라는 것은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반복되지 않는 것은 아무런 결과도 남기지 않으니 가볍다. 이 모순이 이 소설의 출발점이다.

이 질문이 무거운 이유는, 대답에 따라 삶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삶이 무거운 것이라면 모든 선택은 중요하다. 한 번뿐이니 잘못된 선택을 되돌릴 수 없다. 삶이 가벼운 것이라면 어떤 선택도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반복되지 않으니 무엇을 해도 상관없다. 이 두 태도 중 어느 쪽이 더 견디기 어려운가. 쿤데라의 제목이 답을 암시한다. 참을 수 없는 것은 무거움이 아니라 가벼움이다.

토마시와 테레자, 사비나와 프란츠. 네 인물이 교차하면서 사랑과 배신과 역사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배경은 1968년 프라하의 봄과 소련의 침공이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유화 운동이 소련의 탱크에 짓밟히는 시대. 역사의 무게 아래에서 개인의 삶이 어떻게 흔들리는가.

토마시는 외과의사이자 바람둥이다. 그는 사랑과 섹스를 구분한다. 테레자를 사랑하면서도 다른 여자들과 관계한다. 그에게 섹스는 탐구다. 각각의 여자에게서 다른 것을 발견한다. 이 구분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쿤데라는 이 질문에 도덕적으로 답하지 않는다. 토마시를 비난하지도, 옹호하지도 않는다. 대신 그 구분이 만들어내는 고통을 보여준다. 테레자의 고통. 그 고통은 토마시의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논리는 감정을 설명하지 못한다.

테레자는 가벼움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다. 토마시의 바람이 그녀에게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다. 사랑이 가볍게 취급되는 것, 신체가 가볍게 취급되는 것, 유일해야 할 것이 유일하지 않은 것. 그녀에게 사랑은 무거운 것이어야 한다. 유일한 것이어야 한다. 대체 불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이 요구가 토마시에게는 짐이 된다. 무거움과 가벼움의 긴장이 이 커플의 관계를 관통한다.

테레자가 느끼는 고통은 악몽으로 표현된다. 그녀는 반복적으로 악몽을 꾼다. 토마시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악몽. 자신의 몸이 다른 여자의 몸과 구분되지 않는 악몽. 쿤데라가 이 악몽을 상세히 서술하는 이유는, 테레자의 고통이 의식의 차원이 아니라 존재의 차원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녀는 논리적으로 토마시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몸이, 그녀의 꿈이, 그녀의 존재 전체가 그 이해를 거부한다.

사비나는 가벼움의 편에 선 인물이다. 그녀는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려 한다. 국가, 가족, 연인, 이념, 신념. 하나씩 벗어날 때마다 그녀는 자유로워지지만, 동시에 공허해진다. 자유의 역설이다. 구속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자기 자신이 가벼워진다. 가벼움의 끝에 닿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무의미다. 아무것도 붙잡지 않는 삶은 아무것에도 닿지 않는 삶이다. 이것이 쿤데라가 보여주는 가벼움의 역설이다.

프란츠는 사비나의 연인이지만, 사비나와 정반대의 사람이다. 그는 무거움의 편에 있다. 대의에 헌신하고, 이상을 믿고, 행진에 참여한다. 그의 무거움은 진지하지만, 동시에 우스꽝스럽다. 쿤데라는 프란츠를 부드럽게 조롱한다. 대의에 헌신하는 지식인의 자기 만족.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정이 실은 자기 확인의 수단인 경우. 프란츠의 행진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그러나 프란츠에게 그 행진은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의식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쿤데라의 서술 방식이다. 그는 이야기를 하다가 멈추고 철학적 사유를 전개한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로 돌아온다. 이 교차가 자연스럽다. 소설이 에세이가 되고, 에세이가 소설이 되는 경계의 흐림. 쿤데라는 이것을 의식적으로, 체계적으로 한다. 그는 소설의 형식 자체를 사유의 도구로 쓴다.

키치에 관한 대목이 오래 남았다. 쿤데라는 키치를 감정의 합의라고 정의한다. 모두가 함께 느껴야 하는 감정. 장례식에서 울어야 하는 것, 아이를 보고 미소 지어야 하는 것, 국기 앞에서 경건해야 하는 것. 이 정해진 감정에서 벗어나는 것을 사회는 허용하지 않는다. 카뮈의 뫼르소가 떠올랐다.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이유로 단죄된 사람. 쿤데라와 카뮈는 같은 것을 보고 있었다. 사회가 요구하는 감정의 연기. 그 연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치르는 대가.

전체주의 국가에서 키치는 더 노골적이다. 소련의 선전 포스터, 집단 행진, 지도자에 대한 경배. 이것들은 모두 감정의 강제다. 함께 기뻐하라, 함께 분노하라, 함께 슬퍼하라. 개인의 진짜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 표현된 감정만이 중요하다.

가을이 시작되고 있다. 이 소설을 덮고 나서 한참 동안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해 생각했다. 가벼운 삶과 무거운 삶 중 어느 쪽이 더 나은가. 쿤데라의 답은 없다. 다만 가벼움도 무거움도 참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참을 수 있는 삶이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삶이란 원래 참을 수 없는 것이고, 그 참을 수 없음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몫인지도 모른다.

밀란 쿤데라
원저 Nesnesitelná lehkost bytí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