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1권 — 우물 밑에서 시작하는 소설
언제 산 책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파묵이 노벨상을 받기 전이었는지 후였는지도 가물가물하다. 다만 한 가지는 또렷이 남아 있었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이 시체의 독백이라는 사실. 나는 지금 우물 밑에 누워 있는 한 구의 시체다, 라는 문장. 그 한 줄이 인상적이어서 한참을 들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정작 이 소설의 살인범이 누구였는지, 결말이 어땠는지는 답할 수 없었다. 줄거리는 거의 다 휘발되어 있었다. 형식의 인상만 남고 내용은 사라진, 전형적으로 학생 시절의 독서가 남기는 모양이었다.
며칠을 들고 안쪽 의자에 앉아 다시 펼쳤다.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이 책이 왜 그렇게 오래 책장에 머물러 있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한 권의 책이 이런 식으로 시작될 수 있다는 사실. 죽은 자가 자기 죽음을 말하고, 다음 장에서는 한 마리 개가 말하고, 그 다음 장에서는 빨강이라는 색깔 자체가 말한다. 화자가 매 장마다 바뀐다. 사람이 아닌 것까지 화자가 된다. 이 구조는 처음 펼치는 책처럼 낯설었다. 이십대의 내가 잡지 못했던 것은 이 낯섦이었던 것 같다.
소설의 배경은 16세기 말 이스탄불이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비밀리에 한 권의 책을 주문한다. 베네치아 풍의 화법으로 그려진 책. 즉 서양의 원근법과 개인의 시점이 들어간 그림. 당시 이슬람 세계의 세밀화는 신의 시점에서 본 세계를 그리는 것이었다. 그림에 화가의 개성이 드러나는 것은 죄였다. 사람의 얼굴을 닮게 그리는 것도, 그림자를 넣는 것도, 멀리 있는 것을 작게 그리는 것도 신성에 대한 불경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술탄이 이 모든 금기를 깨는 책을 비밀리에 주문한다. 그 책의 제작에 동원된 세밀화 거장 중 한 명이 어느 밤 살해된다. 이 살인이 소설의 시작이다.
읽으면서 가장 오래 머문 것은 살인범이 누구인가 하는 표면의 질문이 아니었다. 한 문명이 다른 문명의 보는 방식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 문명의 내부에서 무엇이 무너지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세밀화 거장들은 서양 화법이 단순히 한 가지 기술적 선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원근법은 인간의 시점이고, 인간의 시점은 신의 시점을 밀어낸다. 인물의 얼굴을 닮게 그리는 것은 한 개인을 다른 개인과 구별짓는 것이고, 그 구별은 결국 화가 자신의 서명까지 끌어들인다. 한 줄의 서명. 세밀화의 세계에서는 결코 허용되지 않았던 것. 작품이 작가의 것이 되는 순간, 신의 것이었던 세계는 인간의 것이 된다.
이 변화가 좋은가 나쁜가에 대해 파묵은 답하지 않는다. 다만 그 변화의 무게를 한 명 한 명 다른 화자의 입을 통해 들려준다. 어떤 화자는 새로운 화법이 가져다 줄 명예와 부유함을 꿈꾸고, 어떤 화자는 그것이 가져올 신성의 상실을 두려워한다. 어떤 화자는 두 마음 사이에서 흔들리다 결국 한쪽을 택하고, 어떤 화자는 그 흔들림 자체를 견디지 못한다. 어느 쪽도 단순히 옳지 않다. 어느 쪽도 단순히 그르지 않다. 이 양가성을 끝까지 끌고 가는 작가의 끈기가 이 소설의 무게다.
이십대의 나는 이 책에서 무엇을 봤을까.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는다. 화자가 바뀌는 형식의 신선함 정도가 인상에 남았던 것 같다. 그때의 나에게 16세기 이스탄불 화공들이 겪은 갈등은 멀리 있는 이야기였다. 어떤 전통이 어떻게 끝나는가, 그 끝남 안에서 한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짓는가에 관한 감각이 그때의 나에게는 자라지 않았던 것이다. 형식만 보고 내용을 통과시킨, 흔한 학생의 독서였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가장 오래 멈춘 대목은 한 거장이 자기가 평생을 바친 세밀화의 기법을 후학에게 설명하는 장면이었다. 말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가. 말의 다리는 어떤 각도여야 하는가. 한 마리 말이 그려지기 위해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십 명의 거장이 정리해온 답이 있다. 그 답을 익히는 데만 한 사람의 평생이 들었다. 그렇게 그려진 말은 어느 한 사람의 말이 아니다. 모든 세밀화 거장이 그려온 그 한 마리 말이다. 작가가 사라진 자리에 전통이 남는다. 그리고 그 전통이 곧 신의 시점이라는 거대한 한 가지 시점을 떠받친다.
서양 화법은 정반대를 요구한다. 화가의 눈앞에 있는 그 한 마리 말. 그 말의 그 순간. 다음 날이면 그 말은 다른 말이 되고, 다른 화가는 같은 말을 다르게 본다. 그래서 그림은 한 사람의 것이 된다. 한 사람의 서명이 들어가야 한다. 서명이 들어간다는 것은 곧 화가가 그 그림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뜻이고, 책임을 진다는 것은 곧 그가 한 명의 개인으로 세계 안에 서 있다는 뜻이다.
이 두 화법의 차이는 단지 화법의 차이가 아니다. 한 사회가 한 개인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신의 자리와 인간의 자리를 어떻게 정리하는가, 시간과 영원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관한 두 개의 다른 답이다. 그 답이 충돌하는 자리가 이 소설의 무대다. 책을 읽으면서 자꾸 멈추게 되는 것은 이 충돌이 어느 한쪽의 승리로 끝나기에는 너무 깊은 자리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한 거장이 평생을 다해 도달한 말 한 마리의 자세는, 어느 새로운 화가가 자기 눈으로 본 말 한 마리의 자세 앞에서 더 이상 변호되지 않는다.
이 한 줄의 의미를 풀어내는 데 책의 절반이 든다. 변호되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인기를 잃는다는 뜻이 아니다. 더 이상 누구도 그것을 위해 평생을 거는 이유를 찾지 못한다는 뜻이다. 한 화법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 화법이 곧 사라진다기보다, 그 화법을 떠받쳐온 한 세계의 무게가 사람들의 어깨에서 슬그머니 내려간다는 뜻이다. 그 내려감을 자기 어깨로 가장 또렷이 느끼는 사람이 곧 거장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첫 죽음은 우연한 살인이 아니다. 한 시대가 한 사람의 몸을 빌려 자기를 끝내는 의식에 가깝다.
소설에는 사랑 이야기도 있다. 카라라는 인물이 십이 년 만에 이스탄불로 돌아온다. 어린 시절 사랑했던 사촌 셰퀴레를 다시 만난다. 셰퀴레에게는 두 아이가 있고, 남편은 전쟁터에서 오랫동안 소식이 없다. 두 사람의 관계가 살인 사건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른다. 사랑 이야기가 추리 골격의 다른 한 축이다. 그러나 이 사랑조차도 단지 사랑이 아니다. 카라가 셰퀴레에게 이끌리는 방식, 셰퀴레가 카라를 응시하는 방식에는 새로운 화법의 시선이 이미 들어와 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의 얼굴을 닮게 그리고 싶어 하는 욕망. 그 얼굴을 잊지 않으려는 욕망. 이 욕망 자체가 이미 옛 세계의 금기 안에 있다. 사랑 이야기조차 한 시대의 변화를 알리는 신호로 작동한다.
솔직히 1권의 중반에서 한두 번 책을 덮었다. 화자가 너무 자주 바뀌는 것을 못 따라간 적이 있다. 누가 누구의 사촌인지, 누가 누구의 스승인지, 헷갈려서 앞으로 돌아가 확인해야 했다. 16세기 오스만 행정 조직의 이름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단락에서는 옮긴이의 주석에 여러 번 의지했다. 이 책의 자랑인 다성적 구성이 동시에 책의 진입 장벽이기도 하다. 일주일 정도 책을 덮어둔 적도 있었다. 그래도 다시 펼쳤다. 어느 화자의 한 문장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1권의 후반에서 살인의 정황이 조금씩 풀려간다. 거장 한 명의 죽음 다음에 또 한 사람의 죽음이 이어진다. 진상은 아직 멀리 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해진다. 이 살인은 한 사람의 분노나 욕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한 시대 전체가 다음 시대로 넘어가는 진통 속에서 발생한 것이다. 작은 폭력은 큰 변화의 증상이다. 그리고 그 증상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자리는 늘 가장 정교한 기술을 쥐고 있던 사람들의 작업실이다. 손이 가장 섬세한 사람일수록 시대의 떨림을 가장 먼저 느낀다.
1권의 마지막 몇 페이지에서 한 화자가 등장한다. 악마라고 불릴 자가 자기 입으로 자기를 말한다. 이 장이 이상하게 마음에 오래 남았다. 악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말하는가. 거기에는 자기 변호도 없고 자기 비판도 없다. 다만 자기가 무엇인가에 관한 차분한 진술만이 있다. 이 차가움이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차가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달의 책장 어디쯤에서 비슷한 차가움을 만난 적이 있었다. 두 책이 다른 시대, 다른 장르인데 같은 온도를 공유한다는 사실이 한 번 더 책을 덮게 했다.
2권은 다음 달에 이어 읽기로 했다. 이번에는 결말까지 가야겠다. 살인범이 누구인가보다 더 궁금한 것이, 살인범이 자기 입으로 자기를 말할 때 그가 어떤 어휘로 자기를 설명하느냐다. 그가 이 시대의 어느 자리에 서 있느냐다. 1권을 덮으며 자꾸 그 질문이 머리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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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
원저 Benim Adım Kırmızı (1998)